14. 디텐하임
diary – 14. Dietenheim
2004년 09월 18일 (토) in 디텐하임
오늘 아침은 조금 피곤함을 느꼈다. 별로 무리한 것도 없는데…
문득 잠자리에 더 파고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내가 벌써 이런 불편한 잠자리에 익숙해져버렸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호스텔은 도미토리가 혼숙이다. 헉. 여기저기서 여자들이 부시시 일어난다. –; 암스테르담 호스텔이 혼숙이라해서 꼭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여자들을 의식 해야되니 별로 안 좋다.
일찍 식당에 내려가 아침식사를 했다. 젊은 사람들이 많아서 식당이 학교 기숙사 분위기가 나는데, 음식들을 마음데로 가져다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체크아웃 준비를 했다. 자전거 복장을 입으면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 또 자전거구나… 휴-.
자전거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의 그 정복감이나 성취감은 대단한 것이지만 막상 자전거에 올라서 출발하기가 무섭다. 오늘은 얼마나 헤메려나, 얼마나 달리려나…
디텐하임은 엇그제 기차에서 만난 할아버지들이 사는 마을인데 마을 자체가 그리 크지 않은 시골이라 뮌헨에서 바로 가는 길이 없어 ‘ㄱ’자로 꺾어 가야한 한다. 도로의 이정표도 발견할 수가 없다. 할아버지들도 자전거로 오기 보다는 근처 큰 도시인 우임Ulm까지 기차로 와서 우임에서 디텐하임까지 25km정도만 자전거로 오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난 고집을 부려 자전거를 선택했고… 그 댓가로 결국 도중에 세번이나 길을 잃었다.
목적지가 프랑크프루트 같은 대도시라면 이탈리아에서 로마를 찾아갔듯이 이정표만 보고 따라가면 되는데, 이번엔 시골길을 달려야 하기 때문에 무척 힘들었다. 길도 꼬불꼬불하고…
점심 때 쯤 어느 마을에 들러 중국식당을 발견하고 점심을 닭고기 볶음밥을 먹었다. 이것도 얼마만에 밥이냐… 상당히 맛있었다.
주인집 아들이 단번에 한국인이냐고 알아본다. 내가 다시 물어봤다. 유럽사람들은 당연히 일본인인줄 알고, 일본인들도 일본인인줄 알고, 한국인들도 일본인인줄 아는데, 어찌 한국사람인줄 단번에 알아봤냐고. 일본사람은 키가 작은데 너는 키가 커서 한국 사람으로 보였다고 한다. 은근히 기분이 좋은걸-.
두번이나 길을 잃었다. 한 마을은 3번이나 같은 길을 지나치기도 했다. 내가 마법진에 들어온 것 같았다. 나침반을 봐도 길을 못찾으니…
그렇게 100km 정도 자전거로 가서 도착한 아우구스부르그Augsburg에서 결국 포기하고 기차를 탔다. 요금을 계산해 보니 아우구스부르그에서 우임까지 12.90, 뮌헨에서 우임까지 18.xx 겨우 0.5 정도 아끼려고 빡시게 오전을 허비했단 말인가… 허무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그 때라도 기차를 탄건 잘 한 일이었다. 기차를 안탔으면 할아버지들과 약속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할 뻔 했다.
우임에서 디텐하임까지는 남쪽으로 약 25km. 우임역에 도착해 기차에서 내렸을 때는 해가 서쪽하늘을 벌써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무조건 남쪽으로 난 길로 자전거를 몰았다. 물어물어 찾아가다 보니 또 한치 앞도 구분할 수 없는 어둠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내가 이탈리아 산 속에서 치를 떨었던 야간 주행. 두렵다.
다행히 뮌헨에서 깨진 랜턴 전구를 새로 구입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또 중간에서 발이 묶일 뻔 했다. 깜깜한 도로에서 시험삼아 랜턴을 꺼보았는데 이탈리아 산을 넘을 때 처럼 아무것도 안보이는 것이었다. 정말 다행이다. 빛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한 마을에서 낙엽을 치우고 있던 아저씨에게 길을 물어보았다. 무척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였다. 친히 집에 돌아가 지도를 가지고 나와 보면서 설명해준다. 독일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다 라는 인상에 못을 박는다. 정말 아저씨가 알려준 것과 똑같이 길이 펼쳐졌다.
바나나도 기차에서 다 먹어버리고 힘겹게 어두운 길을 가노라니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진다.
어찌어찌 디텐하임에 도착해서 길가는 사람에게 브루거Brugger 할아버지 집을 물어 찾아갔다. 이미 10시가 다 된 시간이었는데, 문을 열고 나온 할아버지가 정말 반갑게 맞아주었다.
뒤뜰에 있는 별채로 나를 안내해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할머니(정말 젊다)와 13살 작은 딸(할아버지인줄 알았는데 아저씨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 내내 내가 오길 기다렸다고 한다. 그래서 엇그제 같이 있던 할아버지와 ‘그 놈이 안올란갑다’ 하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저녁 늦게 와서 정말 반갑다고 했다. 늦게라도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를 쓰는 지금은 원래 건물로 모두 돌아가고 별채에 혼자 있다.
집이 궁궐같다. 별채에다가 자동 커튼에 차고, 정원 등등… 이 정도 능력이 되니 자전거를 여가로 즐기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다 자기가 열심히 한 만큼 사는 것 아니겠어.
또 하나의 목표가 생긴다. 이런 집 갖기.
씻고 났더니 피곤이 몰려온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2004년 09월 19일 (일) in 디텐하임
처음 이곳에 오기 전에 생각하길 내 여정에 따라 지나가는 길에 하룻밤 신세지며 묶어가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할아버지들은 나를 귀찮은 손님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정말 편하고 가족적인 분위기에 내가 전혀 방해도 안되고 한 한달 정도 있어도 티도 안날 만큼 큰 집에 부족한 것 없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뭐, 그래서 염치는 없지만 하루만 더 묵기로 했다.
무엇보다 이 집 사람들은 여유롭다. 일에 쫒기거나 급하지 않고, 주말마다 여가를 즐기고 평일에는 집을 가꾸고 청소하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부족함이 없어서 여유로운 것일까, 여유로워서 부족함이 없는 것일까.
시리얼 , 빵, 케익, 과일, 야채, 우유, 쥬스 진수성찬에 아침을 배불리 먹었다. 안주인 할머니가 신경을 많이 쓴 것이 눈에 보인다.
식사를 끝내고 근교로 두 할아버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하이킹을 갔다.
그림같은 독일 전원풍경을 달려 산길을 접어 들자 할아버지가 취미로 기르는 꿀벌집이 나왔다. 근처에 아카시아 꽃이 많아 좋은 꿀이 난다고 했다.
숲길을 빠져나와 근처 레스토랑에서 차를 타고 온 할아버지 가족들과 점심을 먹었다. 물론 나는 얻어먹었다.
메뉴판을 봐도 알아먹을 수가 없었지만 쌀이 그립다고 허니 스테이크에 라이스가 나오는 메뉴를 시켜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가 예전에 선수로 뛰었던 축구팀의 경기를 관람했다. 아쉽게도 졌다.
집에 창고에는 빔프로젝터와 탁구대가 있는데, 탁구를 쳐서 할아버지, 할머니, 작은딸 이렇게 세명한테 모두 졌다. –;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딱 보면 잘 살 수 밖에 없다고 느껴진다.
호탕한 성격에 여유가 넘치고, 운동도 잘하지, 정말 모든게 부러움의 대상이자 나의 목표로 설정되는 것 같다.
작은 딸에게 우리나라 식으로 숫자를 읽는 법을 알려줬더니 매우 신기한 듯 계속 숫자를 만들어 보면서 좋아했다.
원래는 내가 사진을 찍어 나중에 인화해서 보내주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더 좋은 사진기를 가지고 있었다. –; 결국 내가 사진을 받기로 하고 주소를 다시 한번 알려주었다.
사과로 만든 와인인 아펠바인 독한 버젼을 한 잔 먹었다.
여행 이후에 최고로 편한 잠자리, 맛있는 음식에 가족적인 분위기를 느끼니 여행의 묘미가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운이 참 좋았던게지…
단지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 사는 집이겠거니 하고 찾아온 집이 자연을 사랑하고 여유롭게 삶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멋진 곳이라니.. 아마도 나는 평생의 목표를 이 브루거 할아버지에 맞춰야 하지않을까 싶다.
내일 다시 프랑크프루트로 떠난다. 할아버지가 퓌센Fussen이나 하이델베르크Heidelberg가 좋다고 추천을 해주었는데, 이곳 디텐하임에서 이틀을 소비하며 많은 것을 구경했기 때문에 그냥 바로 프랑크프루트로 가기로 했다.
내일도 함께 우임으로 가서 함께 관광을 하고 나를 환송해주겠다고 한다.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다.
뜨거운 물에 샤워, 독한 와인 한 잔, 따뜻한 오리털 이불… 집에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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