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베네치아 가는 길
diary – 9. To Venice
이제 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쌀쌀하다.
피렌체를 출발한 건 D+10일인 12일 저녁, 민박집을 나서며 케밥으로 저녁을 때우고 바나나와 배, 복숭아를 챙겨 베네치아로 떠났다. 바나나를 비롯한 과일이 스테미너에 짱이다.
그리스 파트라스 민박집에서 자전거 라이트를 한참 켜놓은 적이 있는데 건전지를 사서 갈아끼워도 안되는걸 보니 과열로 전구가 나간 것 같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이게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지 날이 밝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베네치아는 피렌체 북동쪽에 있어 이탈리아를 횡단해야 한다. 거기에 산이 있을 거란 걸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인지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지도에도 고도는 나와있지 않고, 사람들도 잘 몰랐다.
정작 피렌체를 벗어나는 곳 부터 산기슭, 오르막이었다. 처음엔 버스도 다니고 마을도 꽤 보이니 어느정도 마음이 놓였다. 두메산골은 아니구나.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마신 물 보다 땀으로 나온게 더 많을 거다. 간혹 내리막이 있지만 잠깐이고 끝이 없는 오르막길이다. 자전거 기어는 가장 낮게 해도 힘들고, 평균 속도 7-8 km/h가 나왔다. (평지에서는 18-22km/h 가 나온다) 처음엔 금방 내리막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망할 오르막은 끝날 줄을 모르고 5시간, 그러니까 자정에 내가 노숙을 결심할 때 까지 계속 되었다.
5시간여 동안 산을 타니 주변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가끔가다 나오는 마을 앞 도로가 아니면 가로등이 없어 거의 앞이 보이지 않았다. 때마침 달도 그믐이다. 염병헐! 옛날 과거 보러 가는 선비가 이랬을까? 고장난 후랫쉬를 만져봐도 소용이 없었다. 다행히 형광으로 빛나는 15cm 정도 되는 안전등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사용하더라도 10m 앞이 보이지가 않았다.
그 공포를 아는가? 얼마나 계속 될지도 모르는 길이 거의 보이지도 않고 뭐가 튀어나올것 처럼 주변 숲은 부시럭 거린다. 가끔 차가 지나가면서 주변을 밝혀주면 그것에 의지해 산을 오르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지나가는 차도 뜸해졌다. 이제와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해주던 말이 생각났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차라리 즐겨라,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
웃음이 났다. 죽지만 않으면 강해진다! 힘도 났다.
도중에 반대방향으로 내려가던 오토바이 여행자들이 물을 건네 주었다. 이번에도 그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것이다. 조금 먹고 돌려 주자 다 먹으라고 넘겨준다. 물은 충분히 있었지만 어찌나 고마운지…
자정을 갓 넘기고 산정상으로 보이는 마을 Firenzoula에 도착했다. 간판에 대충 그렇게 그려져 있었다.
이제 내리막이다! 막상 기다리던 내리막에 도착했지만 오르막보다 더 난감한 문제가 발생했다. 빨라지는 속도에 주변이 어두우니 멀리 볼 수 없어 더 위험하고 밤바람에 식은 땀이 매우 차갑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도중에 츄리닝을 빼서 입었는데도 자전거의 속도에 바람이 옷속을 파고든다.
그러다 다시 한번 오르막을 만났는데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또 이 오르막은 언제까지 계속 될까…
노숙을 결심했다. 밤새 달릴 걸 예상하고 낮에 민박집에서 자고 나오긴 했지만 이상태로 가다간 난간을 보지 못해 커브길에서 도로 밖으로 구르거나 체온이 떨어져 얼어죽는다.
한 마을의 주차장 공터에 판쵸우의를 깔고 침낭 속에 들어갔다.
사방은 고요하고 가끔 차소리가 공기를 가른다. 밤하늘에 별이 이렇게 많았던가… 이제까지 보지못한 광경이었다. 침낭 밖으로 나온 얼굴을 찬 바람이 때렸다. 눈을 잠시 부쳤다. 두어시간 잠을 잤나? 추위에 눈을 떴다. 체온으로 유지되던 얇은 침낭 속의 온도가 차가운 새벽 공기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30분을 발광을 했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일어나 마을 어디에 바람을 피할 곳이 없는지 돌아다녀보았지만 헛수고 였다.
이불을 훔치자!
그 마을의 빨래줄에서 얇은 침대보를 훔쳤다. 그 집 아줌마에게는 정말 죄송하다. 장발장이 빵을 훔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덜 마른 것이었지만 침낭 안에 넣으면 오히려 습기 때문에 더 따뜻할 것 같았다.
이불을 훔쳤으니 그 마을에서 잘 수 는 없고, 조금 더 나아가 다음 마을에서 자기로 했다. 이불을 들쳐매고 자기 좋은 곳을 찾아 마을 3개 정도를 지났는데, 정말 운이 좋게도 울타리가 없는 폐가를 찾았다.
안에 들어가니 더러운 매트리스도 있었다. 이런 행운이 있나!
매트리스에 판쵸우의를 깔고 침낭을 얹으니 별5개 호텔이 부럽지 않다. 쌕을 머리에 베고 침낭을 뒤집어 쓰니 앞은 틔여 있지만 바람이 안 불어서 정말 따뜻했다. 귀신 나올 것 같은 집에서 그렇게 다시 달콤한 잠에 빠졌다.
햇빛이 나고 차들이 쌩쌩 달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노숙은 그래도 성공적이다.
침낭과 판쵸우의를 개고 츄리닝도 벗고, 다시 레이싱 모드에 들어갔다.
산을 다 넘었는지 가끔 오르막이 있고, 완만한 내리막이 계속 되었다. 올라갈 때는 그렇게 가파르더니 내려갈 때는 완만하네…
중간에 바나나와 우유로 연료 보급! 내리막길은 Bologna 라는 도시에서 끝났다. 신기하게도 거기서부터는 줄곳 평지였다. 하지만 베네치아 까지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고 마음이 흔들렸다.
그냥 여기서 기차를 타고 베네치아로 들어 갈까? 그러려면 아예 피렌체에서 타고 오지 뭐하러 산을 넘었나. (유레일 플렉시 패스는 날짜로 계산 되니까, 역 하나를 지나든 유럽을 횡단하든 하루 안이라면 똑같다) 괜히 오기가 생겼다. 베네치아까지만 자전거를 타고 다음 번엔 전부 기차로 가는 한이 있어도 베네치아 까지는 간다!
욕심도 생겼다. 오늘 안에 도착한다. 그렇지 못하면 또 다시 폐가를 찾아 노숙을 하거나 비싼 값을 주고 잠을 자야 한다.
진짜 열심히 굴렸다. 보통 하루 중 처음엔 평균 시속 22km/h가 나오고 중반 이후엔 체력이 떨어져 18km/h가 나오는게 보통의 내 페이스인데, 끊임없이 바나나와 쿠키로 에너지를 주입하면서 베네치아에 도착할 때 까지 22km/h를 유지했다.
솜바지도 소용없다. 항문이 파열됐다. 다리보다는 상체를 버틴 팔이 더 아팠다.
날은 이미 어두워 졌지만 산길이 아니라 가로등이 거의 끊기지 않는다. 다행이다. 베네치아 이정표가 교차로마다 보일 무렵, 참치캔과 고추장으로 마지막 영양 보충을 하며 베니스 호스텔을 가이드 북에서 찾아보니… 문제가 발생했다. 버스는 없고 배만 있는 베니스에서 호스텔이 바포레토라는 버스용 배를 한번 타고 갈 수 있는 섬에 있었다. 이 밤에 바포레토가 다닐리 없잖아! 이런 미네랄…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결국 강을 따라 베네치아로 향하면서 폐가를 찾기에 이르렀다. –; 서럽다. 좀 상황이 좋지 않다. 폐가는 다 울타리가 있거나 문이 막혀있고, 도시가 잘 발달되 있어 그나마 쓰지 않는 건물이 많지 않다. 숙박 업소는 많지만 비쌀 것이고.
그러다가 캠핑장 이정표를 발견했는데 보통의 캠핑장 처럼 캠핑카 + 텐트 그림에 침대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혹시나 하고 들어가 물어보니 침대 시트 없이 하룻 밤에 12?? 란다! 그래, 난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냥 바람만 막아 주면 되!
안내 된 곳은 컨테이너 박스에 침대가 두개 들어가 있는 조그만 방이었다. 침대는 도미토리 형식은 아니고 그냥 일행이면 두개를 쓰고 혼자면 1개를 쓰는 것 같다. 불도 켜지고, 옷걸이도 있고, 콘센트도 있다. 왜 지금까지 캠핑장에 이런 시설이 있다는 걸 몰랐을까? 앞으로 노숙은 자제하고 캠핑장을 애용해야 겠다 생각하면서 짐을 풀고, 공동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웠다. 이 시간이 11시 정도 였다.
샤워하러 갈 때, 야외에서 떠들고 이야기하던 사람들도 각자의 차와 텐트로 들어가 조용하다. 꼬박 하루를 넘게 달려 씻지도 못하고 있다가 이렇게 씻고 침대에 누우니 살것 같다.
이 날 달린 거리가 218km, 11시간을 자전거 위에 있었다. 그 전날, 피렌체 부터 계산하면 280km, 16시간.
허리 빼고 목, 팔, 다리, 항문 다 아프다. 허리는 왜 안아프지. 안티푸라민 챙겨가라는 어머니 말씀 안들은게 후회된다. 유럽 약국에도 안티푸라민이 있으려나…
오늘은 나폴리에서 로마 간 것 보다 훨씬 더 고생해서 그런지 몸은 피곤하지만 기분이 더 좋다.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원래 마음 먹은대로 해낸 것이 뿌듯하다. 한편으로는 무식하다는 생각도…
그래서 앞으로는 현실과 잘 타협할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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