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피사 & 피렌체

diary – 8. Pisa & Firenze

2004년 9월 11일 18:56 피렌체 민박

여행 시작한 이후로는 매일 꿈을 꿨다. 무슨 꿈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깨고 나면 꼭 내 방일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오늘도 로마에서 꿈을 꾸고 6시경에 일찍 눈이 떠졌는데 다시 누워서 뒤척였다. 하루가 시작되는게 두렵다. 솔직히!

엇그제 로마에 도착했을 때 민박집 이모님이 특별히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라고 했었다. 난 육개장이 무지 먹고 싶어서 해주실 수 있냐고 지나가듯 말했었는데, 오늘 아침 메뉴가 육개장이었다. 돈을 떠나서 정말 가족처럼 잘 대해줘서 정말 고맙다. 미역국은 아니었지만 두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체크아웃도 따로 없다. 3일치 숙박비를 그냥 건네 드리고, 자전거를 가지러 내려가니 엇저녁에 내려와 정비할 때 채워두었던 앞바퀴에 바람이 다시 빠져 있었다. 젠장헐… 자세히 보니 타이어에 작은 스프링 하나가 박혀 있었다. 펑크가 난 것이다.
일부러 열차시간에 딱 맞춰 나왔는데 늦겠군…
일단 대야에 물을 떠오고 타이어 내장을 꺼내 바람을 조금 넣고 물에 집어 넣어 힘을 준다. 그러면 구멍이 뚫린 곳에서 공기방울이 나온다. 펑크 난 곳에 패치를 붙였다. 조립 후 확인하니 다행히 바람이 다시 빠지진 않는다.
얼른 역으로 갔더니 다행히 피사행 열차가 출발 직전이었다.

아직 이탈리아 밖에 보지 못했지만 이쪽(유럽)은 기차가 매우 활성화 되어있다. 도시는 작고 땅덩어리가 커서 그런 듯하다. 어쨌든 자전거 칸에 자전거를 실으면서 시모네Simone를 만났다. 먼저 나에게 자전거를 같이 묶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객실 칸에 와서도 이야기를 나눴는데, 피사에 있는 여자 친구를 보러 주말마다 자전거를 가지고 피사에 간다고 했다. You’re good boy friend! 한국에도 가본 적이 있고 서툴은 영어지만 먼저 말을 걸어주는 오픈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의 현지인들은 외국인하고 오래 이야기 하는걸 싫어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자전거 칸 바로 앞 객실이 폐쇠되 자리를 옮겨야 할 때도 이탈리아어를 듣고 서투른 영어로 내게 말해주었다.

피사에 도착하니 시모네가 쪽지를 한 장 건네며 메일 주소란다. 처음으로 현지인 친구를 사귀게 되는 순간이었다. 무척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먼저 다가가지 못한게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난 항상 뭔가 받아주는 입장에 서 있어야 하는가.
시모네가 피사의 탑 까지 자전거로 안내 해주고 갔다. 정말 감동 받았다.

피사는 피사의 탑 밖에 볼것이 없다. 다른 로마 유물과 달리 피사의 탑은 원래 생각했던 것 보다 거대했다.
시간이 갈 수록 조금씩 더 기울어져서 보수공사를 했다고 한다. 똑바로 세울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도 관광의 목적인지 비뚤어지게 놔뒀다고 한다.

피사에서는 탑 기대고 찍기가 유행(?)인데, 운 좋게 한국인 관광객을 만나 혼자서는 찍기 어려운 ‘피사의 탑 받치기’ 사진을 시도해 볼 수 있었다. 흔히들 손을 받치고 찍는데 난 최성국 스타일로 도전해 보았다. 혼자 다니니까 이런게 않 좋군…

다시 역으로 돌아와 피렌체행 열차를 탔다. 붐비는 코스는 아니라 모처럼만에 음악을 들으며 한가하게 한 시간을 보냈다.
검표시간에 내 자전거를 보더니 자전거 표를 보여 달랬다. 자전거 칸에 실으려면 24시간용 자전거 티켓을 3.5?歷? 주고 사야 되는 것이었다. 차내에서는 벌금 5?? 포함 8.5?歷? 내야한다. 아까워라… 순전히 몰라서 그랬다구!

오후 아직 해가 지지 않았을 무렵, 피렌체에 도착했다. 또 한 도시를 정복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민박집을 찼아갔다. 이제 거리 이름으로 주소를 찾아가는데 조금은 익숙해졌다. 로마도 그렇더니 피렌체도 한인 민박은 중국인 거리나 흑인 거리에 인접해있다.
자전거를 주차하고 처음 들어갔을 때는 다른 여행자가 아무도 없더니 저녁 먹을 시간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돌아왔다.
저녁 메뉴는 삼겹살이다! 약간은 푸석푸석한 양배추에 싸먹었는데,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내일은 힘이 솓겠는 걸?

저녁을 먹은 후 피렌체의 야경을 즐기러 자전거를 타고 나섰다.
우피치 미술관 인근 거리의 바이올린 악사. 그 옆으로는 베르니 탄생 150주년 연주회 연주자들이 지나가면서 대조를 이룬다. 저 거리의 연주자가 더 실력이 좋을지도…

단테와 베아뜨리체의 다리에선 플룻을 부는 할아버지 악사를 만나 잠시 멈춰 한 곡을 들었다. 왠지 모르게 구슬퍼진다. 동전을 못줄망정 훌륭한 연주에 박수라도 쳐 줘야지. 하지만 박수를 치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이었고 할아버지는 나를 보고 눈을 찡긋 했다.
이쪽 사람들은 내가 좋아하는 위트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에서 횡단보도에 파란불이 켜졌는데, 승용차가 그냥 지나가 버리자 기다리던 청년이 박수를 치면서 ‘Wonderful. wonderful~’ 했던거나, 버스 문이 닫히고 뛰어온 아저씨가 문을 두드려도 안열어주자 떠나는 차에 대고 박수를 치고는 엄지 손가락을 힘껏 치켜드는 거랄지, 교차로에서 더 느린 내 자전거를 기다려주며 고개짓으로 끄덕여 줄 때,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존경하기로 한 미켈란젤로의 이름이 붙은 언덕에 올라 피렌체의 야경을 감상하고 다시 우피치 미술관 앞에 오니 아까 말한 베르디 150주년 기념 오케스트라 연주가 시작되었다.
거리의 악사들과는 또다은 감동이 느껴진다.
두 곡을 듣고 일어서 민박에 돌아오니 다른 여행자들이 식탁에 모여 맛이 유명하다는 토스카나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도 맛좀 보자며 끼어든 자리가 새벽 두 시 까지 이어질 줄이야…
와인이 떨어지자 맥주를 사와서 먹고, 또 밖으로 한잔하러 나갔다가 살인적인 술 가격에 숙소로 돌아와 맥주를 좀 더 마셨다.

세상을 멋지게 사시는 분들이 많다.
명품을 사서 일본에 공수해 주는 에이전트 형.
건축학회에 참가했다가 휴가겸 여행하는 박학다식한 형.
매일 싸운다지만 그래도 부러워 보이는 커플.
KBS ‘세상의 아침’ 작가 누나.
독일교포 2세로 독일어, 영어, 한국어-3개국어를 구사하는 여.
여행 중 하루 25?? 사용의 신화, 공학도이면서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도 쓰는 여,
그리고, 그들에게 무식하고 쌈잘하게 보인 해병대 아저씨.
인디안, 축구선수 최태영, 양현석. 오늘 내가 닮았다는 소리 들은 사람 목록이다. 아마도 내 얼굴이 고글 부분만 안타고 다른 부분이 타서 많이 다르게 보이나 보다.

정말 좋은 기회로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되어 많은 걸 느꼈다. 다들 자기 할 일을 묵묵히 하지만 대단하게 해내고 있구나.

즐거운 시간을 갖고 침대에 누웠지만 이미 늦은 밤이라 피곤하다… 내일은 약간 패턴이 바뀌어서 오후에 자고 저녁에 피렌체를 뜨는 계획이다.

9월 14일 저녁 베네치아 캠핑장에서

(밀렸던 걸 시간 여유가 있어 한꺼번에 쓴다)
아침 7시 30분 경에 일어났다. 몹시 잠이 쏟아졌지만 오늘 계획대로 진행하려면 지금 일어나야 한다.
오전에 일찍 가서 줄을 서야 볼 수 있는 우피치 미술관을 보고, 오후에는 민박에서 잠으로 체력을 보충한 다음, 해가 지고 시원할 때에 베네치아를 향해 자전거를 굴린다는 계획이었다.
나중에야 하는 말이지만, 결국 성공은 했다. 그런데 이보다 멍청한 짓은 없었다.

어제의 민박집 멤버 중, 나를 포함 3명이 우피치 미술관으로 향했다. 좀 늦었나 싶었는데 다행히 30분 정도 밖에 기다리지 않았다.

피렌체는 르네상스 운동의 발화점이고 그 중심이 되는 사람들이 메디치 가문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이 약을 만들어 팔아먹고 돈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아지자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작품들을 사모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르네상스 시대가 오게된 것이었다.
우피치 미술관은 메디치 가문이 그 시절 부터 모은 작품들이 있는 곳이고,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딸이 시집가면서 피렌체에 기증했단다. 대단하다…

미술관의 규모도 커서 오전을 거의 할애하고 점심 때가 되어서야 빠져나왔다.
미켈란젤로의 무덤이 있다는 산타크로체 성당에 들렸다가, 숙소로 돌아오는 도중 미켈란젤로 생가도 보았는데 입장료가 있어서 들어가 보진 않았다.
나도 어제 식빵과 잼으로만 하루를 버틴다는 여자분을 보고 느낀바가 있다. 그렇게는 못하지만 최대한 아껴야지.

민박집에 돌아와 바로 떠날 수 있게 준비를 해놓고 잠이 들었다. 일어나 보니 잠깐 비가 왔더란다. 비가 오면 나는 발이 묶인다. 자전거를 분해하더라도 짐이 커지니까 이동하기가 불편하다.
다행히 갠 날씨덕에 약간은 어두운 하늘을 뒤로 하고 피렌체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