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프랑크푸르트

diary – 15. Frankfurt

2004년 09월 20일 월

어제의 아펠바인 독한 버젼 때문에 깼다가 다시 잔 것이 늦잠이 되버렸다.
아침을 먹고 브루거 할아버지와 디텐하임에서 우임까지 강변 자전거 도로를 따라 달려왔다. 우임에서 프랑크프루트까지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이다. 할아버지는 나를 위해 회사 일도 땡땡이 치고 나와주었다. 물과 나무가 있는 정말 아름다운 길을 마주달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중에서야 우임이라는 도시가 아인스타인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광장에 E=mc^2 라는 모양의 구조물이 있었거든…
높은 교회의 종탑에 올라가 경치를 감상하고(브루거 할아버지는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엇다 ㅎㅎ), 스파게티를 먹었다.

기차 시간표를 뽑아보니 자전거 때문에 3, 4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것 밖에 프랑크프루트로 갈 방법이 없었다. 하는 수 없지. 이제 기차를 갈아차는 것도 제법 잘 한다. ^^

아쉽지만 할아버지와 작별을 했다. 이틀동안 편안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을 준데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할아버지는 여행을 무지 좋아해서 여러나라를 돌아다녔는데 내년 즈음에 한국에도 갈테니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했다.
흠. 그들을 맞이하려면 나도 영어 공부, 독일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한국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아놔야겠다…
전에도 생각했었지만 한국인인 내가 외국사람들 보다 오히려 한국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여행 중에 정말 멋진 인연을 만든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열차에서 도중에 자면 역을 지나쳐버리기 때문에 자지 않으려고 음악을 들었다. 용량 제한 때문에 듀엣곡 몇 곡만 계속 반복해서 들었지만 여전히 좋은 노래들이다.

여기 유럽의 기차는 자전거와 장애인 칸이 일반 객실과 따로 있는데, 이제는 자전거를 두고 객실 칸으로 가는게 귀찮아 그냥 자전거 옆에 앉아있는다.

내가 어떻게든 혼자 사진을 찍어보고자 반대편에 사진기를 놓고 돌아와 폼 잡는 행위(!)를 계속 하고 있자, 객실칸에서 보다 못한 아저씨가 와서는 찍어주겠다고 했다. –;
(앨범의 기차칸 사진 참조, 좀 흔들렸다.)
싱가폴 아내와 오스트레일리아에 산다는 아저씨는 대한항공 스탑오버로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는데 싸고 좋다고 이야기를 걸어왔다.
동양적으로 생긴 두 딸이 있었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그렇게 서서 아저씨 목적지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사람이란게… 그렇게 작은 것을 공유하는 것으로도 쉽게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할 수 있구나.

프랑크프루트. 일부러 이번엔 작은 민박집을 골랐다. 큰 곳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소홀할 수가 있기 때문에.
프랑크프루트가 큰 도시라 그런지 종착역 프랑크프루트 중앙역 두 정거장 전에서 내려야 민박집과 가까웠다. 같은 역 이름을 보고 내릴까 말까 망설이다가 한 정거장을 더 가서야 내려서 다시 한 정거장을 돌아왔다.
방이 4개 뿐인 작고 편한 민박집이었다.다행히도 어제 손님이 다 빠져나가고 오늘은 나랑 동갑인 여자애 1명과 나뿐이었다.
여행 후 처음으로 라면을 먹었다. 어찌나 맛있던지 어디로 들어갔는지를 모르겠다.

기분이 멍하다. 이젠 여행의 설레임이나 들뜬 분위기는 다 가라앉았고, 단지 향수만이 내 가슴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남은 기간 동안 더 좋은 기억을 만들고 앞으로의 내 인생에 도움이 될만한 결론을 얻어야겠다.

2004년 09월 21일 화

일찍 일어나 씻고 아침을 먹었다. 집에 가서도 이 패턴이 유지된다면 정말 좋겠다.
전문적으로 민박을 하는 집이 아니라 아침은 빵이었다. 그래도 마음 편하게 맛있게 먹었다.

어제 여기서 같이 잔 여학생과 같이 프랑크프루트를 돌아보기로 했다.
나는 내가 늦으막한 나이에 방황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이맘때쯤 자기의 진로와 미래에 대해 고민하나 보다. 얘도 유학할 독일의 신학교를 미리 단체로 견학왔다가 나머지 일정을 혼자 여행하려하고 있는데, 신학 공부를 계속할 것인지, 그렇다면 유학을 할 것인지, 한국에 남을 것인지 여러갈래의 기로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어려운 결정일 듯 하다.
나도 공부와 일과 사업(이건 좀 힘들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지만 아직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어쨌든 인생의 갈림길에서 아직은 아무 생각 없는 두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프랑크프루트를 돌아보았다.

괴테의 생가를 둘러보고, 볼 것 없는 대성당을 보고 그래도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수많은 박물관 중에 통신 박물관을 관람했다. 신기한 기계식 교환기. 전화기로 만든 양…

아펠바인 익스프레스라고 사과로 만든 와인인 아펠바인 한 잔을 주고 시내투어를 하는 버스가 있다고 해서 타러 갔는데 오늘은 운행을 안하는 것 같았다.
성질 나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서 저녁으로 먹을 빵과 함께 아펠바인 한병을 샀다. 0.99?? 겁나 싸다.

하지만 맛은 그 유명세에 비해 별로였다. 가이드 북의 술 소개에 벌써 두번이나 속았다. 그리스에서 우조에 속고, 독일에서 아펠바인에 속고… 그리고 피렌체 투스카나 와인도 솔직히 별로였다.
내가 술하고 잘 안 맞나? 술은 역시 생맥주와 소주가 최고다. 가끔은 막걸리에 바카디 같은 것도 좋고. ^^

저녁에 숙소에 돌아오면 무척 한가해지지만 그 시간에 한국은 밤을 넘어 새벽으로 달리고 있다. 전화도 할 수 없고, MSN도 하는 사람도 없어서 더 적막하다. 오늘은 싸이까지 점검이네… 그게 더 좋은 걸까하는 생각도 한다.
얼마전까지도 내 핸드폰 벨소리 환청에 시달렸다. 금방이라도 내 쌕 안에서 핸드폰이 울릴 것 같은…

난 남의 상황에서 내 고민의 해답을 얻는다. 누군가가 자신의 상황을 내게 말하면 그냥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조언 아닌 조언을 해주곤 하지만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은 내가 겪었을, 겪고 있을, 아니면 겪을 수도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조언은 언제나 내 스스로에게 하는 충고가 된다.
그리고 그런 조언은 누구나 잘 알지만 실천은 잘 안되는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중에 더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지금 더 노력하고 신중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쯤은 누구나 다 알지만, 그것이 힘들고 때로는 귀찮고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는 것이 더 쉽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지극히 맞는 말이지만 용기 있는 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되기는 힘들다.

노력하자, 3류/2류 인생에 머무느냐 1류로 살아가느냐는 내가 마음 먹기에 달린 거다. 3류에 안주하려는 내 자신을 채찍질하자!

내일은 암스테르담으로 출발이다.